[칼럼]을지로 아케이드게임 산업 리포트 1

저자는 정은기 기술문화연구자. 청계천 기술문화연구실과 한양대학교 글로벌 다문화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이론과 비판적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게임, 기술문화, 도시공간을 연구하고 있다. 문화인류학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으며 현재 아케이드 게임의 기술적·물질적 측면을 통해 한국의 정보기술문화, 정보자본주의를 다루는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본 원고는 OO은대학교 연구소의 <을지로는 기술대학 네트워크 코스>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INTRO1960년대 이후 출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 오락실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1가지나 2개는 갖고 있는 이른바”전자 오락실 세대”이다. 추억의 대상이<공간 침입자>나<갸 러그> 같은 슈팅 게임이거나<스트리트 파이터>시리즈나<철권>시리즈 같은 대전 격투 게임이거나<펌프>나<DDR> 같은 리듬 액션 게임에서 다른 것도 있지만 여기서 언급된 거의 모든 게임은 통상 세운 세상 운 상가로 불리는 청계천의 전자·전기 관련 상가 밀집 지역을 직접·간접적으로 거치고 유통하고 보급했다. 특히 세운( 세운)상가나 돈(나동), 즉 현재의 대림 청계 상가는 아직도 한국 아케이드 게임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30년 이상 대림 상가에 위치하고 있는 게임 관련 부품 업체인 삼덕사를 중심으로 을지로-청계천 일대 도심 제조업 네트워크의 역사와 특징 등을 볼까 생각한다.청계 상가청계천 전자 상가의 전사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전자 상가는 1968년에 완공된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인 세운 상가로 대표되지만 그 시작은 세운 상가가 건설되기 휠씬 이전부터이다. 일제 시대 끝에 청계천 일대는 미군 공습에 대비해서 무슨 건물도 짓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이른바 소개 공지에 지정되었다. 일본식 목조 건물은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에 미국의 공중 폭격이 화재로 이어지는 피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하고 도심 내에 빈 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해방 직후 피난 공지으로 빈 청계천 일대에 고물상이 모여서 일제 공장의 잔재에서 흘러나온 공구를 거래하면서 폐품, 장물에 중고 물품 등이 거래되는 암시장이 형성됐다. 한국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정부에서 이 지역을 관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향민이 유입되면서 판자촌이 형성됐다. 사회적 연고나 물적 토대가 아닌 사람들은 밥벌이에 너덜너덜, 고물상, 지게꾼, 노점상 등 생존을 위한 일을 청계천 인근에서 하게 됐다. 미군의 PX에서 흘러나온 각종 전자·전기 제품과 일본에서 밀수입한 물품이 여기에 유입하기 시작하고 전자 제품을 다루는 노점 시장이 장사동, 예지동 일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같은 애프터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는 당시의 청계천 전자 상가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각종 전기·전자 제품을 거래할 수도 있지만, 수리 및 개조도 가능한 전자 상가의 모습에 조금씩 변화했다.판자촌과 영세 노점이 가득한 청계천 일대는 불결함과 빈곤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정부는 “불량 지구 개량 사업”을 추진하면서 노점과 판자촌을 철거하고 현대식 주상 복합 건물인 세운 상가의 건물 군을 건설했지만 건설 초기에는 현재와는 다른 의복, 생활 필수품, 양품 등을 판매하는 다양한 상가가 들어서고 있으며 텔레비전, 라디오, 오디오 등 가전 제품까지 판매하는 종합 백화점으로서 유명하게 됐다. 또 유명인의 거주지로도 각광을 받았다.그런데 이런 명성은 10년이나 계속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명동 백화점이 명성을 되찾고, 강남이 개발되고부터 고급 주상 복합 소비 공간으로서의 세운 상가는 점차 인기를 잃어 갔다. 세운( 세운)상가에 거주하고 있던 입주자들은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임대료가 떨어지고 그들이 벗어난 아파트 공간이 사무실과 창고, 소규모 작업장으로 변해주상 복합 건물의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 198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전자 게임 관련 기업도 대림 청계 상가에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청계천 일대는 세운( 세운)상가로 대표되는 전자 상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대림청계상가 내부대림 청계 상가에 게임 관련 상점이 밀집 형성된 배경 현재 디지털 온라인 게임은 산업적으로 전도 유망하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전자 게임이 처음 국내에 소개된 시점인 19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해외에서 유행하는 것을 지켜본 일부 기업이 일본 전자 게임을(밀)수입하는 무단으로 복제하는 방식으로 전자 게임 제작과 유통 사업을 시작했다. 1977년경부터 전자 게임 제조업자가 세운( 세운)상가 지역에 집중하면서 1980년대 초 국내 최대 게임기 생산지가 되었다. 이렇게 빨리 게임기의 생산지가 된 이유는 청계천-을지로 일대에 이미 게임 관련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첫째로 청계천은 전자·전기 제품이 도입되는 통로였다는 점이다, 그 통로가 공식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통로도 가능했다는 점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는데, 정치·경제적으로만 이뤄졌을 뿐 대중 문화가 1998년 10월부터 시작된 일본 대중 문화 개방 조치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왜색다고 금기시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게임은 대개 정식 수입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입되어 세운 세상 운 상가의 업체마다 모방·복제되면서 국내에 유통할 수 있었다.둘째, 오랫동안 기술 시장인 전자 상가로 발전하고 쌓은 “도심 내 제조 업체 간 산업 연계”라는 입지 이점을 가졌다는 점이다. 전자 오락실을 운영하던 윤·경식 씨(남, 67세)은 이렇게 말했다. “게임이라는 것은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많죠. 완성(물건)로 가져오거나 부속으로 가져오거나 이런 곳에서 온 세금 문제가 있겠죠. 그러니 거의 완성의 경우는 신품의 경우는 드물어요. 독특한 것은 완성에서 오는 것이 있지만 비디오 게임의 형태는 완성에서 오는 것은 아닌 “. 이처럼 일본의 전자 오락은 주로”중고”을 부속으로 분리하고 수입한다. 분리된 게임기를 다시 짜고 수리할 정비해야 했다. 게임 기계는 큰 게임을 보여인터페이스인 “TV모니터”, 기타 부속이 결합된 사례이다”캐비닛”로 구성된다. 청계천 일대는 텔레비전 같은 전자 게임 기계의 모니터를 유통·수리할 수 있는 가전 제품 제조 업체와 설비, 공구 재료 부품 등을 다루는 기계와 공구 상가, 그리고 케이스이며 캐비닛의 소재인 아크릴을 다루는 회사까지 모두 모이고 있었다. 분리하여 수입된 전자 게임 기계는 청계천 일대에서 다친 곳은 수리되고 없는 부품은 만들어 묻혔고, 새로 제작된 캐비닛에 결합된 뒤 국내 유통됐다.셋째, 삼덕사 임·승텍 부장은 다용도사가 설립되자마자 이곳에 위치한 가장 큰 이유로 게임”기판”을 취급하는 업자 등이 당시 이 청계 상가에 밀집했다는 점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기판은 게임을 구동하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인 하드웨어이다.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 이 기판을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청계천 일대가 거의 유일했다. 수입 업체들이 가져온 게임 기판은 청계천의 기판 복제 업자들로부터 복제된. 그들이 펼친 복제는 단순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일본 게임 그대로 베끼는 “단순 복사”만 아니라 불법 복제 단속과 왜 색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게임의 구조나 배경 등을 변경하는 “개조”더 진행되고 새로 오락을 “제작”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복제를 수행한 기술자도 청계천의 특성상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수리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자 게임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기기의 부품을 보고수정하면서 게임 관련 지식을 터득했다. 외국에서 수입된 이론적 지식보다는 체득한 지식이 한국 실정에 잘 맞다 왜냐하면 수입된 중고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장물을 이용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게임을 복제, 개조, 제작하면서 그동안 축적된 오디오 음향 기술, 텔레비전 송신기 기술 등을 전자 게임 제작할 때에 추가 등 나름대로의 기술력을 축적하는 세계적인 게임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삼덕절을 통해서 본 전자 오락 산업의 흥망 성쇠삼덕사 전자 오락 관련 산업과 그 토대로 지은 상가의 흥망 성쇠는 삼덕 사라는 기업의 부침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삼덕사는 현재, 죠이 스틱과 버튼이라는 게임기 부품 업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국내 업체의 하나이다. 삼덕 절은 세운 상가가 전자 오락 산업에서 호황을 맞던 1980년대, 대림 청계 상가에 입주하고 지금까지 영업하는 업체다. 공장은 성수동에 있지만 수많은 판매, 유통 생산 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을지로로 영업점을 설치했다. 영업점에 두 공장에 4명 정도가 일하는 소규모 기업이다.1970년대 말부터 전자 오락실은 전자 게임이란 대중 문화를 누릴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속에 확산되고 있었다. 1970~90년대 전자 오락실이 활발해지면서 국내 전자 게임 산업은 성장세를 이어 갔다. 삼덕사는 세운( 세운)상가에서 기판을 수입, 개조, 복제, 개발, 게임기를 생산하는 업체를 타깃으로 영업을 하고 그들에게 조이 스틱이나 단추 같은 게임기 부품을 판매했다. 이때 생산된 전자 게임기는 전자 오락실이나 학교 근처 문방구에 유통됐지만 조이 스틱과 버튼을 주로 생산하던 삼덕사는 이런 흐름에 발맞추고 사업을 확장하고 전자 오락실 전용 캐비닛을 개발하는 판매하기 시작했다. 국내 거의 모든 전자 오락실의 전자 게임 캐비닛은 다용도사의 cw201, cw202, cw203캐비닛이 석권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가장 사업이 번창했는데, 이때는 직원이 영업점만 4~5명이 상주하고 공장에는 10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팽창했다는삼덕사 전자오락 관련 산업과 그 토대로 세워진 상가의 흥망성쇠는 삼덕사라는 기업의 부침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삼덕사는 현재 조이스틱과 버튼이라는 게임기 부품업체 중 가장 유명한 국내 업체 중 하나다. 삼덕사는 세운상가가 전자오락 산업으로 호황을 맞던 1980년대 대림 청계상가에 입주하여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는 업체이다. 공장은 성수동에 있지만 수많은 판매, 유통, 생산업체가 밀집해 있는 을지로에 영업점을 설치했다. 영업점에 2명, 공장에 4명 정도가 일하는 소규모 기업이다.1970년대 말부터 전자오락실은 전자게임이라는 대중문화를 누리는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퍼져나갔다. 1970~90년대 전자오락실이 성행함에 따라 국내 전자게임산업은 계속 성장해 나갔다. 삼덕사는 세운상가에서 기판을 수입, 개조, 복제, 개발하고 게임기를 생산하는 업체를 타깃으로 영업을 하고 이들에게 조이스틱이나 버튼과 같은 게임기 부품을 판매했다. 이때 생산된 전자오락기는 전자오락실이나 학교 인근 문구점에 유통됐는데 조이스틱과 버튼을 주로 생산하던 삼덕사는 이런 흐름에 발맞춰 사업을 확장하고 전자오락실 전용 캐비닛을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국내 거의 모든 전자오락실 전자오락실은 삼덕사의 cw201, cw202, cw203캐비넷이 석권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가장 사업이 번창했는데 이때는 직원이 영업점에만 4~5명이 상주하고 공장에는 10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팽창했다고 한다.세운상가와 전자게임산업의 미래,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세운맵 포스트 칼럼으로 이어집니다!세운맵 청계천-을지로 일대 도심 제조업 지도 map.sewoon.org세운맵 청계천-을지로 일대 도심 제조업 지도 map.sewoon.org저자는 정은기 기술문화연구자. 청계천 기술문화연구실과 한양대학교 글로벌 다문화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이론과 비판적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게임, 기술문화, 도시공간을 연구하고 있다. 문화인류학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으며 현재 아케이드 게임의 기술적·물질적 측면을 통해 한국의 정보기술문화, 정보자본주의를 다루는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본 원고는 OO은대학교 연구소의 <을지로는 기술대학 네트워크 코스>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